#1. 소셜 : 뜻밖의 여정
인간오세정(~2015상반기)
2005년 10월, 학부 학생회장의 권력이 마지막을 달할 즈음... 

 
평소 함께 수학하던 동문들과 차별된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던 나는 선생으로부터 PR Agency란 곳을 추천을 받았고, 어차피 학점도 토익도 뭐도 없던나는 그냥 떨래떨래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행정학'을 전공한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실무를 하게 되었는데, 뭐...첫인상은 좀 놀랍다는거? 내가 나온 학당이 제일 꼬졌을만큼 학벌이 제일 후졌어는데, 왜 이사람들이 초봉 1800~2000을 받고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매일 야근과 제안서작업은 디폴트였고, 황실(클라이언트)과 기자의 두 분류의 '갑'을 모시는 이런 서비스직(난, 서비스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전문직이라고 우겼지만)을 왜 이고생을 해가며 하는지 몰랐다 이거다. 어찌되었든 메타커뮤니케이션즈란곳을 갔고, 그곳에는 노력형 천재급의 대표 '노범석'대표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에스코토스 컨설팅의 대표인 '강함수' 소장(당시에 소장)도 있었다. 언젠가 강함수대표님에게 물었더니 "도저히 기자미팅에 내보낼수없을것 같은 외모라 뽑지 말자고했다"고 한다. 그래... 이 둘이 내가 사회에 나올때 첫 면접을 봤던 분들이다. 

 여하튼... 행정학전공자로 공공PR부문의 대가로 키우겠다는 노범석 대표님의 생각과는 달리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 적성에 맞는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미FTA체결지원단의 홍보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한미FTA체결지원단 블로그를 내가 담당하게 된거다. 이유는? 내가 제일 어리니까. 하는거다. 내가 하고싶었던게 아냐! 그때...이 정파의 세계(여기서 정파는 PR베이스의 가치관 라인이라고 해두자)에서는 '온라인'을 뭐랄까...좀 허접한 것? 즈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언젠가 사수에게 "조중동에 기획기사 몇줄나가는거보다 네이버 메인에 나오는게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했을때, "이런 기본이 안되어있어요. 공부좀하세요 세정씨"하던 답변을 받은 나다. 

그러니... 온라인... 더구나 '블로그' 따위 관심도 없고, 할 사람도 없고, 내가 하게 된거다. 
자... 문제는 이걸 돈이 되게 비즈니스를 해야하는데, 당시엔 뭐가 정립되어있지도 않았고 블로그나 웹페이지가 먼지도 모르는 시대니까 뭐가 할게 없는거다. 그때 대충 FTA관련 뉴스기사를 퍼오고(지금보면 종니 웃긴일이다. 저작권도 몰랐을시기) 관련 칼럼 긁어오고, 그리고 무려!! 웹툰을 만들었다. 박대감이라고 회사에 한살많은 동기가 있었는데 이 박대감의 지인을 통해 무려 웹툰을 컨텐츠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거다. (아...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같으니라고...) 언제나 책임감이 투철했던 나는 이 블로그를 띄우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을 했다. 그때 당시 내 검색능력이 떨어져서일지 모르겠으나 기업블로그는 거의 없었고, 재정경제부가하던 경제통이라는 블로그가 하루에 몇백명씩 들어오는 아주 부러운 블로그였고, 국회의원 원희룡 블로그 정도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따로 언급을 하겠지만 원희룡 블로그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당시 정말 획기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의원실에서 라면먹고 있는 원희룡사진이나 스타크래프트 게임장가서 구석에서 구경하는 원희룡사진이나... 암튼 컨텐츠에 있어서 무지하게 재미났던 기억이 난다. 

암튼 이건머 벤치마킹도 할때도 별로 없고, 어찌되었든 무지하게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이게 노출이 잘 안되는거다. 한미FTA라고 검색을 하면 반대하는 컨텐츠의 글들만 좌라라락 올라오고, 왜? 우리의 컨텐츠는 메인페이지에 노출이 안되는거냐!!! 이거다. 그때 당시 나의 열정은 가히 최고!! 거짓말 안하고 네이버 고객센터에 전화를 한 50통은 한 것 같다. 윗사람도 바꿔달라고 하고 따지고, 화내고 하면서 알아낸게 몇가지가 있다. 검색엔진이란게 좋은 컨텐츠를 상위에 빼주는데, 검색키워드의 텍스트반복, 그리고 이미지풍부, 동영상 컨텐츠나 오디오 컨텐츠 포함등의 풍부해보이는 컨텐츠, 같은 블로그면 조금더 꾸준하거나 방문자가 많은 블로그의 신뢰성 등등 ... 그때는 필요에 의해 그랬는데, 그걸 '검색엔진최적화'(엄밀히말하면 최적화는 아니라고 본다. 이건 좀 웹페이지의 접근성이나 이런 IT적인 이야기고)나 '검색엔진상위노출'이란 이름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고, 사실은 황실(기업)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말이다. 

결론적으로, 뭐랄까 이놈의 '온라인'이란것이 나름 더 적성에 맞는것 같았단 말이다. 당시에는 나도 정의를 내리거나 체계가 잡히진 않았지만 핵심은 "어떤 컨텐츠가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게 하는 것" 오히려 이 작업이 황실과 기자느님들에게 치이는 생활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단 것이다. 

 그러나... 꼬꼬마이던 내가 뭘 알겠는가? 그냥 이런것도 있구나...라는 생각만 하다가... 지금은 웨버센드윅(아...이름참 어렵다)부사장님이고 당시에는 에델만에 계셨던 쥬니캡(이중대 부사장)님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거다. 

 "야...너 기업블로그 파봐..." 

 에...참고로 쥬니캡님과의 인연은 한겨레PR아카데미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한겨레PR아카데미는 왜갔냐고? 내가 행정학 전공자로 메타에 갔을때 지구과학교육전공자로 황상현코치(현, 에스코토스 디지털본부장)가 내게 다가와 "니 이력서에 뭐라도 넣고 기초를 닦으려면 수료하는게 좋을거야"라는 조언을 듣고다. (아... 이거머 위인들이 초반부터 너무나오는데 이런 위인들은 별도로 따로 다룰예정) 

암튼 한겨레PR아카데미에 가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지금은 같은 농구단에서 농구를 하는 관계... 뭐 그정도다. 
다시 돌아와 난 물었다. 

 "이게 뜰까요?" 

 당연히...난 그때당시 에델만에서 쥬니캡님이 전략적으로 디지털PR쪽으로 밀어준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고 기아자동차 글로벌 블로그의 커리어도 가지고 있었던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건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내딛듣 엄청난 발걸음이었는데 전통적인 PR을 하던 쥬니캡님하가 온라인쪽 비즈니스를 조금씩 리드했던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원했던 대답은 '이게 뜰거야', '이거하면 잘될거야' 뭐 이런거였는데 돌아온 대답은... 

 "나도 몰라" 

아...겁나 야속했다. 쥬니캡님하는 이미 오프라인 PR커리어로도 많은 커리어를 쌓아왔고, 난 이제 1년찬데 온라인하다가 망하면? 난 뭐하라고? 지금 보면 되게 웃긴말인데, 당시엔 진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긴했다. 이게 될지 안될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PR agency에서 온라인이란게 더 그랬단 거지... 중요한 포인트는 쥬니캡님하도 나에게 던진 단어는 '기업블로그'였단 말이고, 나도 그랬고, 당시엔 그랬던것이 '블로그' 말고는 없었다. 조금 더 뒤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셜'이란 단어를 마음껏 내뱉은건 아직도 좀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